삼국지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창비 출판,
2003년 7월 10일 초판 발행, 2013년 7월 30일 전자책 초판 발행
나의 독서 습관은 할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거의 매일 통화를 했는데, 늘 첫마디는 이거였다. "요즘은 뭐 읽니?"
공부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시지만, 책을 읽으라는 소리도 안 하셨지만, 늘 그렇게 물어보셨다. "요즘 읽는 책은 뭐니?"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뵀을 때도 우리의 대화는 책이었다.
건강이 악화되시기 전에 너무 읽고 싶다고 하셔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빌려드렸는데, 눈이 안 좋아지셔서 다 읽지 못하셨다.
그래서 나에게 어떤 내용인지,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물어보셨다. 그게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대화를 끝내고 일어서자, 할아버지의 간병을 도와주셨던 간병인 어머님이 놀랐다며 말씀해주셨다.
할아버지께서 저렇게 맨정신으로 대화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아마 할아버지께서는 아셨겠지.
이제는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그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눌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읽는다.
다시 그렇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을 생각하며.
초등학교 때까지는 할아버지께서 읽으면 좋을 책들을 알려주셨었다.
그중 하나가 삼국지였다.
삼국지는 참 다양한 버전으로 읽은 것 같다.
처음에는 아동용 1권짜리 삼국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상, 중, 하 3권으로 된 삼국지, 그리고 만화 삼국지.
중학교에 들어서야 이문열의 10권짜리 삼국지를 사서 읽어 볼 수 있었다.
10권 전권을 한 번에 샀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그 이후로 학창시절에는 시간이 많은 명절만 되면 삼국지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명절만 되면 삼국지가 읽고 싶어진다. 마치 연말만 되면 해리포터가 읽고 싶어지는 것처럼.
해리포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가장 사랑하는 책이자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삼국지였다.
해리포터가 나온 후부터는 가장 많이 읽은 책은 해리포터가 되었지만,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책은 삼국지이다.
왜 삼국지가 좋을까 여러 번 생각해봤지만, 답은 잘 모르겠다. 좋은데 이유가 있을까.
소설의 매력은 '이야기', 특히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삼국지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희대의 영웅이 되어 지금까지도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난세에도 자신의 삶을 꾸려나갔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까지.
삼국지를 읽다 보면 그들의 삶을 하나하나 함께 하는 기분이 든다.
어릴 때는 용맹무쌍한 장군들의 전투 장면이나 지략가들의 전략 싸움, 특히 이 모든 것이 정점을 이루는 적벽대전이 나를 사로잡았었다.
그러다 보니 조조도 죽고 유비도 죽고 손권도 죽고 1세대들이 모두 죽고 난 후의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어서 후반부는 잘 안 읽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뒷이야기가 더 와닿게 되었다.
해외 생활을 하며 전자책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전자책 삼국지는 황석영의 삼국지로 선택하였는데, 옮긴이의 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역시 '삼국지'를 읽는 맛은 가슴이 썰렁해지도록 밀려오는 사람의 일생이 덧없다는 회한과, 그에 비하면 역사는 자기의 흐름을 갖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옳고 그름을 판결하게 된다든가, 조금 주어진 생이지만 사람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반성 등일 것이다."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이 결국에는 죽고, 그들이 이루었던 왕조들이 결국에는 망하는 것을 보면 인생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잘.
역시 고전의 매력은 내가 성장하고 변화함에 따라 달리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에는 또 이와 같은 문구가 있다.
"고전은 무엇보다도 원문대로 전달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누구나 그것을 읽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에 따라 해석하고 비판하고 재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황석영의 삼국지는 이에 충실한 삼국지이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로 작가의 어떠한 주관 없이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이문열의 삼국지는 뛰어난 묘사력으로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는 것이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먼저 읽고 황석영의 삼국지를 읽은 것이 좋았다.
이문열의 삼국지는 삼국지 이야기의 매력을 알려주었고, 황석영의 삼국지는 삼국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해 주었다.
둘 중 어떤 책을 선호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둘 다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 같다.